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팔 전투 (문단 편집) ==== [[일본 극우사관]]에서의 평가 ==== 이러한 정황 때문에, 인도의 독립을 도운 의로운 전투로 평가한다. 이른바 [[대동아 공영권]] 시기, 1943년 11월 5~6일에 열린 대동아회의에 참석한 찬드라 보스는 연설에서 "아시아, 아프리카의 모든 민족의 해방은 [[대동아전쟁|이 전쟁]]에 있어, [[추축국|일본과 그 동맹국]]이 승리와 성공을 하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다. 일본 여러분의 이름은 새로운 동아시아를 만드는 분들로서만 아니라 '신세계의 건설자'로서도 역사에 새겨질 겁니다."라고 말했다. 비록 일본은 전투에서는 패했지만, [[귀축영미]]에 당당하게 맞서 아시아는 더 이상 백인 침략자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, 용기를 불러 일으켜 독립을 이끈 계기가 되었다고 믿는다. 그리고 이런 믿음을 열심히 퍼뜨리는 중이다. 물론 [[인도]], [[베트남]], [[알제리]], [[이집트]], [[아이티]][* 심지어 [[아이티]]는 당시 최강의 열강으로 꼽히던 [[프랑스]]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치러, [[제1차 세계대전]]이 터지기도 전에 독립에 성공했다. 아이티의 [[아프리카]]계 주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학살하고 아프리카에서 더 순종적인 [[노예]]들을 데려 오겠다고 히히덕거리고 아이티 독립군 지도자 투섕에게 협상을 제안해놓고 손님 자격으로 온 투섕을 투옥하는 등 비열한 짓거리만 골라서 하고도 패배한 프랑스는 말 그대로 대굴욕을 당했다. 하지만 독립 이후 아이티는 한동안 프랑스의 요구로 프랑스에게 돈을 내느라 경제가 파탄났다.], [[필리핀]], [[에티오피아]] 등 전세계의 피식민국가들은 수백년 전부터 민족 정부, 주권 정부를 세워 보겠다며 열강에게 피터지게 저항하고 있었으므로 이는 2차 대전 이후 식민지들이 대거 독립한 사실에 이 작전을 끼워 맞춘 것에 가깝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